히나타는 일명 코트의 파라다이스, 37구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라이즈 아울의 관리 하에 있는 37구역은 술과 노래가 넘쳐나는 향락의 공간이자 코트의 유일무이한 비전투 구역.
이 암묵적 룰은 전 세대에는 몇번인가 깨지곤 했었던 것 같지만 현 보스, 보쿠토 코타로가 보스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단 한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반짝이는 거리의 풍경에 히나타는 기분이 붕붕 뜨는 것을 느꼈다.
보스의 강제 휴가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히나타였지만 야마구치의 추천으로 와 본 37구역은 그 마음이 싹 사라질 정도로 황홀했다.
거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사람들이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고, 공예품이나 그림을 파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거기 소년, 뭐 필요한 거 없나? 물건 좀 보고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히나타를 불러세우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여러 물건들을 펼쳐 놓았다.
"우와, 이거 직접 만든 거에요?"
"그럼! 여자친구 없나? 어떤 걸 고르던, 받는 사람이 기뻐할 거라는 것 하나는 보장할 수 있지!"
히나타는 주황색 보석이 달린 팔찌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보석은 방향에 따라 노란색이었다가 주황색이었다가, 또 어떤 방향에선 강렬한 붉은 빛을 뽐냈다.
"보는 눈이 있군."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할래요."
"포장 필요하나?"
"네. 리본도 달아주세요. 거기, 귀여운 그걸로."
"누구, 여자친구 중 건가?"
"아니, 동생이요."
"좋은 오빠로군."
히나타는 곱게 포장된 팔찌를 받아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사내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히나타는 다시 거리를 둘러보며 화려한 불빛을 즐겼다.
한참을 걷던 히나타는 신나는 재즈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살짝 어두은 노란 조명의 가게 한 가운데에서 푸른 프릴옷을 입은 여자가 경쾌한 리듬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기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달라면 주겠지만?"
멀끔한 인상의 바텐더가 피아노에 정신이 팔린 히나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다지 이른 나이는 아니지만,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진저에일로 부탁해요."
"운이 좋군, 이번에 새로 만들어 놓은 진저에일이 제법 괜찮거든."
"...같은 걸로 하나."
히나타는 옆자리에서 나즈막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금발의 소년이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드다란 몸에 턱선 보다 조금 길게 내려온 단발머리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두드렸다.
"너도 혼자 왔어?"
그는 히나타가 말을 걸어오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히나타의 반짝반짝한 표정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일행이 있기는 한데, 혼자 사라졌어."
"그래? 난 히나타 쇼요, 19살이야."
"뭐? 19살이야?"
"아니, 글쎄. 이른 나이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히나타의 말을 들은 바텐더는 순간 경악해서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켄마."
"켄마? 그거 성이야? 이름?"
"코즈메 켄마, 20살."
"앗, 연상이네...요? 코즈메...상?"
"켄마로 괜찮아. 말도 편하게 해."
"그래! 켄마는 37구역에 살아?"
"아니, 22구."
"우와, 22구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거긴 어때?"
"그냥 평범해."
"음... 난 37구도 오늘 처음 와본거라."
"왜? 37구는 코트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잖아?"
"어... 뭐랄까, 시간이 없었달까... 별로 기회가 없어서."
히나타는 빨대로 진저에일의 얼음을 휘저었다.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 테이블을 살짝 적셨다.
바쁘게 살긴 했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히나타는 선셋 레이븐의 몰락의 위기에서 살려내 지금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보스와 스가와라의 방패이자 총칼로서 유년을 보냈다.
그래선지 지금의 평화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하던 자신이, 여유롭게 피아노 선율 속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쉬고 있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언젠가 22구도 가볼 날이 있으면 좋겠다."
히나타는 감상에 젖은 투로 말했다.
"그래. 나쁘지 않은 곳이야."
켄마가 히나타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며 말했다.
조명 아래 고양이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빛났다.
"켄마, 뭐해?"
그때 켄마의 얼굴에 일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날카로운 눈매의 커다란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쿠로."
독특한 머리스타일의 남자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허리를 숙여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이 꼬맹이는 뭐야?"
"꼬맹이 아니거든요!"
남자의 위협적인 인상에 흠칫 놀랐던 히나타는 꼬맹이란 소리에 충격을 받고 버럭-소리를 질렀다.
"하? 나보다 작으면 다 꼬맹이야. 게다가 너, 켄마 보다도 작은데?"
"이익...! 꼬맹이라고 하는 사람이 꼬맹이야...!"
히나타는 분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뭐야, 얘. 재밌네?"
"쿠로, 쇼요 놀리지 마."
켄마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쇼요? 꼬맹이 이름이 쇼요야?"
"히나타 쇼요에요! 꼬맹이 아니고요!"
남자는 킬킬거리며 히나타의 곱슬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츠키시마나 부하들이 이 광경을 봤으면 필시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그쪽은 닭벼슬이거든요?"
"뭐? 다...닭벼슬...!"
히나타가 버럭 소리치자 쿠로오는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고 켄마는 웃음이 터져 쿡쿡 거렸다.
"어이, 켄마! 웃지마! 어이, 꼬맹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꼬맹이 아니라고요! 그쪽이 날 꼬맹이라고 부르면 그쪽이 누구든 그냥 닭벼슬이거든요?"
으르렁거리는 두사람에 켄마는, 이제 아예 대놓고 웃고 있었다.
"아무리 37구역이 비전투 구역이라고 해도, 여긴 코트라고? 주제를 모르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될 거다."
쿠로오의 말에 히나타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이 도시에서 죽는 놈들은 대부분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방심하는 놈들이지. 내가 보기엔 당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형형한 살기를 뿜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히나타에 쿠로오도, 켄마도 일순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허... 자신만만한 걸 보니 어중이 떠중이는 아닌가 보지?"
"이 정신나간 도시에서 어중간한 것들이 살아남을 수나 있나?"
히나타는 잔에 남은 음료를 단숨에 들이키고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켄마, 대화 즐거웠어. 나 먼저 가 볼게."
히나타는 의자에서 내려와 옷 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래, 나중에 보자."
"당신은 안봤으면 좋겠네요."
쿠로오를 힘껏 째려본 히나타는 고개를 획 돌리고 쿵쾅쿵쾅 발을 구르며 가게를 나섰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보자는 건 무슨 뜻이지...? 22구에 놀러 오라는 뜻인가?'
............
"쿠로, 일일이 성질 부리는 거 창피해."
"뭣? 너 그 건방진 꼬맹이가 꽤나 마음에 드나보다?"
"확실히... 쇼요는 기대 이상일 것 같아."
"? 무슨 뜻이야?"
"쇼요야."
"알 수가 없지. 무슨 말인지."
"소문의 괴물말이야. 13구역에서 선셋 레이븐이 키우고 있다는, 선셋 레이븐 부활의 일등 공신 '야차', 그가 참여한 전투는 항상 생존자가 제로여서, 조직원 이외에는 아무도 정확한 신원을 모른다는..."
켄마의 말에 가느다란 눈매가 크게 뜨였다.
"뭐? 중학생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 그 꼬맹이가?"
"19살이라던데?"
"으아... 완전 의외네... 까마귀 놈들이 뭘 그렇게 숨기나 했더니...뭐, 그럼 니 말마따라 곧 만나겠네."
"이번 회담은 레이븐이 주관하기로 했지?"
"응. 나흘 후."
"조금 기대될 지도."
"켄마가 이렇게 흥미를 보이다니, 굉장하네. 뭔가 재밌는 대화가 오갔나봐?"
"아니, 그냥 평범했어. 그냥, 뭔가... 분위기랄까, 직감이랄까... 흥미가 생겨."
"흐응... 네가 그렇다니 나까지 기대되네."
.................
히나타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인상 더러운 닭벼슬 같으니라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전화를 꺼내 시간을 본 히나타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여동생을 생각했다.
'돌아갈까.'
"거기 너, 꼬마! 잠깐 이리 좀 와보지?"
'또 어떤 자식이 꼬마래...'
히나타는 뒤통수에 날아든 꼬마라는 단어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끼며 몸을 거칠게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꼬질한 민소매를 입은 대머리 근육맨과 터질 것 같은 셔츠를 입은 뚱뚱한 남자가 건들건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뭐야, 기분 나빠.'
"이 형님들이 저-기 파칭코에서 돈 좀 벌려고 하는데, 좀 투자해 줄래? 10배로 돌려주지."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네. 이미 가져온 돈 다 탕진하고도 정신을 못차린 놈들인가 보지.'
"아니, 별로 돈 필요 없고, 그보다도, 꼬마라고 부르지 말래요? 불쾌하거든요."
히나타는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뭐? 쬐그만게 건방지게...! 말로 할 때 주는 쪽이 신상에 이로울 걸? 앙?"
"남의 구역에서 깽판치기 싫으니까 빨리 꺼질래? 냄새나게 생겨가지고 내뱉는 대사마다 족족이 삼류 양아치 같아서 짜증나거든?"
"이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죽고 싶어?"
'아... 또 꼬맹이라고 했어... 진짜 죽여버려...?'
히나타는 문라이즈 아울의 구역에서 깽판을 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지 생각해 보았다.
이번 세대 최초로 37구역의 룰을 어긴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저 양아치들을 그냥 두기에는 너무 열받는다...!
"굳이 싸우고 싶으면 투기장도 있어!"
갑자기 나타난 목소리가 말했다.
목소리의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자 유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이 서 있었다.
독특하게 머리를 올린 청년은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무... 문라이즈 아울의...!"
주변이 시끌시끌해지자 의아함을 느낀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쿠토 코타로야...!"
웅성거림속에서 들려오는 이름에 히나타는 화들짝 놀랐다.
저 사람이 직접 뛰는 보스...!
"거기 형씨들은 어때? 투기장으로 갈까?"
양아치들은 보스 등판에 사색이 되어 파랗게 질려있었다.
"감히 이 거리를 더럽히려던 건 아니겠지? 자, 선택해. 투기장으로 가던가, 우리 애들 따라가던가."
사람 좋아보이던 얼굴에 위험한 살기가 돌자 양아치들은 말을 더듬으며 투기장을 가르켰다.
"자, 그럼 빨리 가자? 저기 무기도 다 준비되어 있어!"
그는 다시 싱글벙글하는 얼굴이 되어 히나타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죽여도 된다고?"
자신에게만 들리게 말하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놀라 히나타 쳐다보자 그는 여전히 멋진 미소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
'츠키시마가 사고치지 말라고 했는데... 뭐, 이정도면 허용 범윈가?'
히나타는 경기장 위에서 대충 몸을 풀며 생각했다.
양아치들은 상대가 작은 소년이라는 사실에 다시금 건들거리는 자세로 돌아와 깐족거리며 흉악한 무기들을 흔들어댔다.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한 번에 덤벼."
히나타가 소매를 걷으며 말하자 양아치들은 거슬리는 소리로 낄낄 웃었다.
"완전히 미친 놈 아냐?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되나 봐! 저거봐, 겨우 너클 하나 골랐어! 아주 죽여줍세-하는 군."
양아치들이 떠들어대는 와중에 경기장 밖에 앉아있는 보쿠토는 기대에 찬 표정을 지은 채였고 히나타는 그의 태도가 영 껄끄러웠다.
"자, 그만 떠들고 시작하자고? 날 즐겁게 만드는 사람에겐 상을 줄 테니."
-띵!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
"와우! 최고야! 정말 걸작이잖아?"
경기장에는 피떡이 된 대머리 근육맨과 뚱땡이 양아치가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히나타는 피에 젖은 너클링을 거칠게 벗어 바닥에 던졌다.
투기장의 관객들은 무아지경으로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이런 쓰레기들이랑 싸워봤자 몸풀기도 안되는데다가, 옷만 버리고... 쓸데없이 옷만 버렸어! 짜증나게... 이러고 집에 가기 찝찝한데! 좀 쉬어볼라고 했더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히나타는 의식 없는 몸뚱아리들을 발로 차며 투덜거렸다.
경기장에서 폴짝 뛰어내린 히나타는 보쿠토가 건내는 수건을 받아들고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슥슥 닦아냈다.
"이제 가도 될까요? 더이상 놀 기분이 아니라, 돌아가고 싶어요."
"하핫, 진짜 재밌어! 너, 내 부하 안 할래? 너 완전 마음에 든다!"
보쿠토는 호탕하게 웃으며 히나타의 등짝을 팡팡 두드렸다.
"에, 아니, 전 이미 모시는 분이 따로 계셔서."
"뭐? 누구? 어디 소속이야? 우리 쪽으로 오면 안되나?"

"그렇게 쉽게 주인을 바꾸는 부하는, 얻어봐야 별 의미 없지 않나요?"
히나타의 말에 보쿠토는 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환하게 웃었다.
"맞아! 사실이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전 이만 돌아갈게요?"
"응응. 또 놀러와! 나랑도 한판 붙어보자!"
"타조직의 영역에서 그 조직 보스랑 붙는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이상한 사람이네, 부엉이 보스는.'
...........
"이번엔 또 무슨 변덕이었습니까?"
어느새 보쿠토 뒤에서 나타난 아카아시가 물었다.
"응? 뭐가?"
"그 소년 말입니다. 확실히 놀라긴 했습니다만... 보통 아이들을 투기장으로 끌어들이지 않으시잖아요? 거리를 더럽히는 쓰레기들을 대신 치워준다거나 하지."
"아, 그거."
보쿠토는 의자 팔걸이에 손가락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겉모습만 보면 평범한 소년이었는데, 굳이 그를 투기장에 세운 건, 보쿠토상은 그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맞아. 아는 사람...이라고 하나? 본 적이 있거든.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보쿠토의 손가락이 경쾌한 리듬으로 움직였다.
보쿠토와 아카아시만 남은 투기장에 토독토독하는 소리만 조용하 울렸다.
"아주 오래전에... 지옥에 있는 그 아이를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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